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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N5BRA_<Thrownness>


글.심우인큐레이터

작가 현준(NSBRA)은 '던져진 사람' 연작을 통해 관객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작가 스스로에게 던져왔던 이 물음은 2022년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의 시도로 전이되었다. 유화 특유의 진득한 질감과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은 작가 스스로가 허무라는 빈 공간/캔버스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유화가 구현하는 즉물적 시점과 작가의 경험적 삶이 관계를 맺는 지점이 된다.

현준(N5BRA)이 작품을 통해 표현한 자기 근원과 증명에 대한 갈망은 대상 없는 불안감에 매몰되어 있던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한때 삶의 목적과 방항을 찾아 방황했던 내면적 경험을 토대로 삶의 단면을 조형적으로 형상화한 그의 자화상 격이나 다름없는 인물들을 들여다보면 양감의 곡선들이 서로 뒤엉킨 형태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구조는 어떠한 단일한 목적 하에 일관되게 정돈되어 있지 않으며, 작가의 일순 선택의 연속인 여러 획과 캔버스 위 우연적 요소들의 무수한 결합에 따라 추상적 음향을 내는 정형으로 구현되었다.

인간내면의 불안감과 인생의 역정은 단순한 평면이나 일선형으로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작품 공통의 전반적인 어두운 색채의 사용을 바탕으로 할 깊은 명암과 인물들의 묵표정한 응시,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굽이치는 곡선과 붓 터치는 고요함 속 침장된 오래된 불안함을 표상하는 듯하다. 강조된 역동성과 우연성은 작가 특유의 감각에 따라 정돈된 공간 구도와 함께 배치되어, 혼돈과 안정, 조화와 불균형, 발전과 정치가 반복되는 인생을 환기시킨다.

이번 연작을 공간 전체의 색채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의 형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작가는 그림을 그리며, 그림 속에서 하나의 존장를 이식하기위해 형태와 부피를 필요로 했다. 결국 그림 속 대상(인간)은 재현된 것이 아니라 형성된 것이다. 인물들 위에 올려져 있는 구형 (球形)의 모형은 구에 비추어진 빛의 방향과 명암 기법으로 만들어지는 형태와 부피의 출발점이 되었는데, 작가은 자신이 완벽한 존재일 수 없음에도 구의 완벽함에 도달하고자 했던 방향성을 상징하는 것이라 부연한다.

구형 모형의 역할처럼 나침반이 되어 주는 각자의 주된 가치관 내지 지표가 있을 것이다. 삶은 계획된 방향과 목적에 따라 흘러가는 와중에도 우연히 마주치는 현실과 불안함이 나름의 삶의 흔적을 남기며 때로 우리는 궤도와 방향을 수정하기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생의 획들이 모여 큰 틀에서의 우리의 실존적 삶을 구성한다. 인간은 각 선택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각자 인생의 여정에서 순간순강 선택하늘 방향과 더불어 그 방향이 외부와 상호작용함으로써 그인질이 구현되기 마련이다. 작가 현준(NSBRA)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스스로에게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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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N5BRA_<A space odyssey>




무한히 반복되는 자화상, 그리고 우리의 실존에 대하여

작가 현준(NSbra)의 작품을 이야기 하는 데 있어 신체는 빠질 수 없는 논제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품 속 여성의 누드는 현준(NSbra)가 천착해온 소재 중 하나이자 작품을 통괄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를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타자화 시키는 과정으로 바라보거나, 그의 작가명 현준(N5bra)와 연관 지어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는 도구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실, 현준(N5bra)이 수십여 점에 걸쳐 그려온 누드화는 일종의 자화상에 가깝다.

2017년 작 <I was not your rose, I am not your rose, Ill not be your rose>(2017)는 작가가 20세 무렵 미아리 사창가를 지나면서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그려낸 작품이다.        


"빨간색 글씨의 청소년 출입 금지구역' 그리고 정말 손 두 뼘 만한 창문이 달린 다 무너질 것 같았던 이상 층 높이의 상가 건물..정말 이런 곳에서 매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중략)..할머니 분들이 옷소매를 잡아끌며 아가씨를 보고 가라고 잡는다. 순간 그냥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 무너져 가는 건물 사이로 작가가 목격한 '아가씨'들과 옷을 잡아채는 포주에게서 도망치며 느낀 두려움과 당혹감, 그리고 일종의 혐오에 가까운 공포를 작가는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품 속 허름한 건물의 문을 열고 밖을 힘없이 응시하는 벌거벗은 여성은 가까스로 문간에 기대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문패에서 378'이라는 번지수를 발견할 수 있는데, '378'은 당시 작가가 살고 있던 집의 주소와 같다. 전업 작가를 꿈꾸던 그가 세상에 나와 처음 맞이한 미술계에서 그림은 숫자로 가치 매겨졌고, 작가는 스스로를 마치 매춘부처럼 불리는 금액에 맞춰 무언가를 내놓는 존재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본주의 시장에서 예술의 위치와 작가로서의 자기 존재를 매춘하는 여성에 비유하며 그 연약한 실존에 대해 은유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물 옆의 텍스트를 통해 "나는 너의 장미였던 적 없고, 지금도 네 장미가 아니고, 앞으로도 될 생각 없어"라고 말하며 세상이 만든 방정식에 팔려나가는 물건(장미)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는 강력하고 역동적인, 소위 '남성적' 선언이라기 보다는 스러질듯한 불씨를 가까스로 지키는 여성적' 버팀에 가깝다. 소멸하기 직전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현준(N5bra)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자기 반영의 주요한 주제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로티시즘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재와 그에서 오는 불안에서 비롯한다.
2021년부터 제작한 '피투' 된 인간 시리즈는 이러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낸다. 작가의 세 번째 개인전 제목인 Sand Castle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 특히 작가 자신의 불안정성에 대한 인식은 그 후에 제작된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뒤틀린 포즈로 서 있는 나체의 여성 위에 정액과도 같이 뿌려진 물감-페인트-는 대상화된 신체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얹어지지만, 그럼에도 인물들에게 섞이지 못하고 화면 밖에 머무르며 평면과 바깥 세계의 경계를 인지시킨다. 섞일 수 없는 내부와 외부가 두꺼운 물감의 마티에르에 의해 구별되며, 회화 속 인물은 일종의 보호받을 수 있는 세계로 도망치게 되지만 그로 인해 회화 안에 고립되며 소통 역시 단절된다. 반복해서 그려지는 누드화의 흐름에서 신체는 계속적으로 무너지며 일부는 뒤틀려 있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 정신적으로어려운 시기를 겪은 작가의 내면과 불안한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무너진 신체에 대한 인식은 작가로 하여금 또 다른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한다.

2023년 현준(N5bra)의 작품에서 가장 큰 변화는 유화의 등장이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라는 배경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첫 번째 개인전을 선보였던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잉크와 아크릴 스프레이, 마스킹 테이프와 아크릴 마커를 사용하여 낙서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캔버스에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2023년, 특히 이번 개인전 스페이스 오디세이 : 불안과 감상에서 선보이는 신작들은 모두 유화로 제작이 되었으며 이 전작의 균일한 표면과 달리 물감의 마티에르를 살린 터치를 강조한 붓질로 다소 거칠게 마감되었다. 유화로의 전이는 작가 스스로 인식한 신체의 무너짐에서 비롯된다. 작품 안에서 무너진 여체는 작가 자신을 의미했고, 캔버스-세계-안에서 불안정한 인물은 존재가 흔들리고 있음을 나타냈다. 화면 안에서 작가는 무너진 원근법과 신체 구조를 보며 불안정한 작가 스스로의 상태에 대한 거울로 삼았다. 인물을 공간 안에 바로 세우는 것이 존재의 증명이리라 느낀 작가는 가장 솔직한 재료라고 생각한 유화물감을 사용하면서 고전에서 비롯한 원근법을 이용하여 인물을 화면 안에서 바로 세운다.

인본주의 시대에 고안된 원근법은 평면 안의 세상을 지키는 규율과도 같았으며 일종의 로고스로서 기능한다. 작가는 자신의 불안을 오래된 전통적 재료인 유화와 전통 화법인 원근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물을 관통하는 원뿔형의 구조물들은 일종의 보조선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구조화하여 만든 결과이다. 몸을 뚫고 지나가는 창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얼핏 인물을 해치고 있는 무기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들을 화면 안에 온전히 존재하도록 붙잡고 있는 생명선에 가깝다.

<던져진 사람(2023)에서 보이는 인물화에서 나타나는 중첩된 인물의 눈은, 여러 개의 눈을 가졌다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 아르고스를 떠올리게 한다. 지평선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한 쌍의 눈은 바른 위치를 가지고 있지만 나머지 눈은 잘못된 투시로 생기는 오류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인데, 이는 작가가설정한 시점 이외의 상태를 중첩하여 표현함으로써 다른 시점에서 존재하는 눈을 그려 놓은 것이다. 기준선에 맞게 존재하는 눈이 작가에게 있어 안정과 평안을 상징한다고 가정했을 때 원근에서 벗어나서 존재하는 나머지 눈은 일종의 분열된 자아이자 불안의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
결국 작가 현준(NSbra)에게 있어 그린다는 행위는 불안과 안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실존하는 자신의 존재 증명을 찾아가는 영원한 과정인 것이다.
"내 인생은 그저 똑바로 서 있기 위한 투쟁이었다...(중략) 삶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내 예술은 개인적인 고백이었다..(중략)..하지만 나는 이 불안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며, 삶에 대한 두려움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를 잃은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의 세기말적 불안을 그려낸 에드바르 뭉크가 남긴 말이다. 작가 현준(NSbra) 역시 21세기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불안한 청년의 자화상을 개인의 실존에 은유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뭉크의 말과 같이 불안이 그의 회화에 있어서 일종의 원동력이라면, 불안이 해소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어디로 가게 될까? 이에 대한 현준(N5bra)의 답은 그가 스스로 인용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실존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피투 된-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기에 영원히 불안하고 외로울 것이나 끊임없이 다시 존재를 증명하고, 찾고, 부여잡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작가의 의지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느껴왔을 외로움에 작은 위로를 던지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로 하여금 현준(NSbra)의 작품에 감동하고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큐레이터 박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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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N5BRA_<Sand castle>


 텅 빈 의식을 채우는 과정은 모래성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는 과정의 반복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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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일적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 수많은 사람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서로를 외부의 사물로 삼아 자신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며 의식의 실재성을 확보 해나간다. 자신의 의식을 채우던 외부의 사물은 각자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나또한 내 의식을 담는 그 외부의 사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 외부의 사물이 아름답기 때문에 편의를 필요 하다고 말하면 그 외부의 사물의 편의를 위해 당연한 듯 희생을 감수 한다.

외부의 사물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조금도 잃고 싶지 않은 집착이 생겨나고. 의식의 공간은 만족을 모르고 점점 커져만 가며 만족이란 느낌은 점점 희미 해져간다. 처음에 의식의 공간에 무엇을 채웠는지는 하찮은 기억력이 이미 까먹어 버렸고, 이제는 너무 거대해진 의식의 공간은 텅텅 비워져 그 공간에 허무함만 남아버린다.

눈앞에 있는 익숙한 가치를 쉽게 이해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 있는 고난이나 역경을 통해서만 더 매혹적인 가치를 인정받으려 했던 거 일지도.

채우기만 하면 되는 건줄 알았다. 한번 의식 속에 들어온 사물은 빠져나가지 않는 건줄 알았다. 하지만 영원한건 없다. 의식도 혹은 그 의식 안에 있는 그 사물도.

의식을 부정한다면 나는 존재 하지 않는 것이고. 의식을 채우는 과정은 모래성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는 과정의 반복 속 필연적으로 마주해야하는 허무함에 대한 내성을 기르기 위함 일지도 모르겠다. 확신은 없다. 그냥 모래성처럼 하염없이 쌓고 쳐다보고 무너트리고 언젠가는 마주하게 마지막 허무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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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N5BRA_<Blue bird complex>



왜 행복을 찾는가.
문득, 내가 내일의 행복만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내일의 나는 올 듯 오지 않는데 왜 나는 그 내일에 목매어 사는 것일까. 오늘의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오늘의 내 현실은 어떠한가.

Blue bird complex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작년만큼의 긴장감으로 살아가도 시원찮을 판에. ‘이 시국’이라는 말이 무섭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COVID-19의 확산세. 무엇이 진정한 믿음일까라는 종교적 특이점. 10년 뒤를 생각하지 않는 조금이라도 잃어서는 안 될 있는 자들의 자본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가 사르트르는 아마 이런 현재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당시의 현실을 보고 <구토>를 저술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재를 보자니 구토가 나온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되고 전화 한 통이면 기어나가 만나던 이들과의 소소한 행복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 버려 철저히 혼자만 남게 되었다. 그간 사회적 물성으로 살아가며 너무 오랜만에 느끼게 된 혼자만의 시간은 결국 나와 나의 사회적 자아마저 분리시켰다. 사회적 격리, 자체적 격리, 자아의 격리로 이어져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개인으로서 어떤 존재였기에 현재와 마주하고 있는가. 나는 현재가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행복하지 않다면 왜인가. 이 시국에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뿐이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나 자신이라도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태껏 나 개인은 존재하였는가. 속이 텅 빈 나 개인은 내 환경 내 주위가 이끈 자아에 성찰 없이 이끌리는 대로 살아가지는 않았는가. 생각은 많아 자신의 인식 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였음에도 타고난 게으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는가. 내 주위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하였으나, 그 사랑은 입체적이지 않은 평면적 사랑은 아니었는가 생각해 보았다. 

내 과거를 살피며 현재의 내가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무엇에 행복을 느끼고 무엇에 불행을 느끼는지 고민하였다.

나의 행복을 찾기 위해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가장 큰 행복이다.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언어 파괴의 일종 ‘기모찌’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의 쾌감과 전율을 준다. 완성되었던 그 그림이 시간이 지나 정말 좋은 작업이었음을 확인했을 때의 기쁨은 내가 계속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필수 영양소같이 작용한다. 그림을 그려온 과거를 생각해보면 힘들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

하지만 그림만 그리니 보니 내 주위엔 소홀했다. “오늘 뭐 하냐?” “그림.” “내일은 뭐 하냐?” “그림.” 매일이 그림이었다. 그림을 안 그리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지라는 생각은 40분 채 넘기지 못하고 또 그림을 그렸다. 나는 눈앞의 쾌감 밖에 생각하지 못했고 그것이 내 유일한 행복이라 생각했다.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다. 나는 오직 나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내 주위 그들이 나에게 얼마만큼 서운해하는지, 그들이 나를 보며 얼마큼 속상해했는지. 나는 내 행복을 위해 그림을 그렸지만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에 주위에 소홀했다. 그들의 속이 미어터졌겠지만 나 또한 속이 터지게 답답했다. 나는 나와 내 주위가 행복하기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다시 행복 조건 딜레마에 빠지게 되어 버린 것이다. 두 마리의 토끼는 어떻게 잡는 것인가. 왜 숫자 100 안에서 50 대 50으로 나눠야 하는가, 더 큰 수를 누릴 수는 없는가 하는 허무한 생각을 하다가도 현실을 보면 쓸모없는 과거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림을 1a라 부르고 그 외의 행복을 2a라고 한다면 1a와 2a를 동시에 저격할 수 없는 파수꾼임에 무능함을 느끼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 전가시켜 버린다. 결국 나는 행복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하지만 행복이란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끝까지 채울 수 없는 것처럼 행복도 마찬가지이다. 행복이란 본질은 없으며 행복이란 본질에 다가가려는 지향점만 있는 것이다. 결국 1a와 2a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는 동시에 나는 대자적 존재임을 꿈꾸는 즉자적 존재임을 인지하며 이 불완전함을 수용하게 된다.

결국 답은 ‘본질은 없다’이다. 행복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이란 개념의 본질은 파랑새에 숨어 있지도 않다. 본질에 대한 나의 수많은 생각은 형이상학적 표상일 뿐이다. 지금의 현실 그 자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고 이 현실에 대해 행복일까 불행일까에 대한 중첩 상황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생각하는 행복의 표상은 내 주위에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확률이겠지만 반반의 상황이라면 관찰하였을 때의 상태에 대해 나는 행복의 표상을 겨냥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자체 모든 것이 행복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어보신다면 대답할 순 없다. 왜냐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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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N5BRA_<Not sorry, and N5bra>


글 심우인  큐레이터
노브라는 2019년 LKIF 갤러리에서 개최되는 첫 개인전 《Not Sorry, and N5BRA》을 통해 인식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의 결과물을 선보인다. 소외된 대상, 즉 우리 인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의 재해석이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을 관통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하여 도입한 차용과 오마주 등의 장치는 작가의 자의적 상징성이 부여됨으로써 독특한 조형 어휘를 새롭게 생산해내는 효과를 낳았다. 그로 인하여 작품은 현대 사회문제를 공유하는 관객과의 소통을 통하여 미학적 공감뿐 아니라 동시대적 서사로 해석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노브라는 낙서를 사회적 소통의 기호로서 견지하며 ‘Not sorry’라는 대목에서 엿보이는 것과 같이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낙서가로서의 태도를 유지하고자 한다.
글 심우인  큐레이터